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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기의 Homo Auditus] 받아쓰기

작성자 관리자 날짜 2025-04-07 10:49:21 조회수 51

 

받아쓰기(dictation)는 쓰기 활동처럼 보이지만, 듣기 활동이기도 하다. 이점을 놓치기 쉬운 건, 우리 말의 음운과 형태와 어휘를 선생님이 말로 불러주면(diction), 그걸 노트에 받아쓰던 어릴 때의 받아쓰기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불러주는 말(diction)’을 제대로 듣지 못하면, 받아쓰기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받아쓰기를 쓰기로만 아는 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일이다. 

발음이 부정확한 서당 훈장이 바람 풍()’자를 가르치며, “나는 바담 풍()’ 하더라도 너희는 바람 풍()’이라고 해라라고 가르쳤다는 이야기는 실제로는 성립이 안 되는 이야기이다. 학생은 선생이 실제로 구술한 말(diction)’을 받아서(dictation), 언어를 배우는 것이다. 특히 발음과 어휘는 선생님의 구술 실제(diction)가 얼마나 정확성과 유창성을 갖추었는지에 따라 받아쓰기의 교육적 효과는 엄청나게 달라진다. 요컨대, 잘 듣게 해 주어야 잘 쓴다. 

방송인이나 가수들의 구술(diction) 능력도 그들의 인기를 높이는 데에 매우 중요하다. 나의 친구 S는 대중가요 <처녀 뱃사공>이란 노래에 나오는 군인 간 오라버니 소식이 오네라는 구절을 여태까지도 꿈인가 놀아보니 소식이 오네로 들었단다. 노래 가사를 문자로 보고서야 알았단다. 가수의 가사 전달, 딕션(diction)’이 실패한 것이다. 음운, 형태, 어휘 연결 등에서 가사 전달이 정확하지도 유창하지도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받아쓰기는 정치나 사회의 영역에서는 괴물처럼 변전할 수 있다. 독재자가 현장을 시찰하며 말로 지시할(dictate) , 수행하는 부하들과 대령한 관료들은 독재자의 말(diction)을 한 음절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받아 쓰고 있는 걸(dictation) TV에서 본 적이 있다. 그런 장면에서 자유와 창의와 개방의 가치를 어찌 구가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 보니, diction(불러주기), dictate(지시하다), dictation(받아쓰기), dictator(독재자) 등이 의미의 차원에서 한 울타리 안에 있다. 이들이 모두 ‘dict’라는 의미(意味素)를 공유하고 있음이 눈에 들어온다. 눈에 안 보이는 받아쓰기 안에 내재한 억압과 경직, 그리고 독재를 응시해 본다. /박인기 경인교대 명예교수·국제PEN한국본부 회원